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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유적

난초9 2014. 10. 17. 10:58

무안 박씨의 유래

항렬 대조표

무안 박씨 계보

인물과 유적

무안박씨족보

유적지
 

오릉(五陵)
경주 오릉

박씨 시조왕 박혁거세, 시조왕비,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의 릉

-소재: 경북 경주

*
1985년 경제 기획원 조사한『성씨 및 본관』에는 무려 128 본.
이 조사에 의하면
박씨 인구 중
밀양박씨는  2,704,617명
 (박씨인구 78.7%)
반남박씨 118,838,
함양 박씨 103,220명
순천박씨 75,888명,
무안박씨 64,695명 순으로 분포


경기묘(景基廟)
경기묘

무안박씨 중시조이하 12대를 봉안(奉安)한 사우(祠宇)

-소재: 전남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
  병산
-1979년  중건
-경기묘 봉안위

본전 : 1세 진승
-東廟 : 6世 구, 6世 부, 4世 유(儒), 2세 섬(暹), 성기(成器, 7世 문오(文晤), 7세 문정(文正)
-西廟 : 11世 강(綱), 9世 천무(天茂), 7世 文衍, 3世 윤위(尹位), 8世 윤류, 10世 의용(義龍), 12世 향(享)


병산서원(柄山書院)
병산서원 

-소재 : 전남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 병산
-건립 : 1778년(조선조 정조)에 창건
-복건 : 1946년
-중건 : 1987년
- 봉안위

-문정선생 박문오(7世)
-풍정선생 박의룡(10世)
-애한정선생  박익경(14世-務安派)
-암천선생 박증(15世-노성파)
-초정선생 박응선(18世-京派)
-죽포선생 박기종(26世-務安派)

  병산서원(또는 柄山司라고도 함)은 1778년 10世인 박의룡(풍정공-楓亭公)을 주창(主倡)으로 창건하여, 1829년에 애한정선생(박익경), 암천선생(박증), 초정선생(박응선) 등 3賢을 봉안(奉安)한 서원.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毁撤-훼손시켜 철폐됨)되었다가 1946년에 옛터에 복건하였다. 1987년에는 현위치에 서 약간 남쪽으로 터를 잡아 한식과 양식을 겸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중건하였다.


보산정
 
보산정 

指定番號 :
鄕土遺蹟 第 11 號

-所在地 : 경기도
 楊平郡
丹月面
 寶龍里 산 33-2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材料 : 木造
-크기 : 正面 4.20m ,  側面 4.30m
-時代 : 高麗 禑王
 1年(1375)

보산정(寶山亭)은 고려 말(高麗 末) 공민왕(恭愍王)(재위(在位)1351∼1374)때 무안박씨(務安朴氏)의 선조인 간의대부 송림공(諫議大夫 松林公)이 당시 정계(政界)와 왕궁(王宮)의 혼란을 피해 이곳에 낙향, 이곳에 시회장(詩會場)으로 건립한 것이 그 기원(起源)이라 한다.

이 정자는 고려 우 왕(高麗 禑 王)1년(1375)에 창건(創建)하고 그 뒤 송림공의 6대손 이조참판 항양공 박원겸(吏曹參判 恒陽公 朴元謙)의 수학당(修學堂)으로서 이후 저명한 유림문사(儒林文士)와 애국지사들의 시회장으로서 혹은 유한야사(有閑野士)의 소요지(逍遙地)로서 사용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차례 중건(重建)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 건물은 1955년 마루를 축조(築造)했고,

1974년 무안박씨 종중(宗中)에서 기둥·벽 등을 시멘트 콘크리트 조(造)로 복원(復元)한 것이다. 지붕은 팔작(八作)지붕에 골기와를 얹은 정면 4.30m(2칸), 측면 4.30m 정방형의 굴도리집으로 겹처마에 단청(丹靑)을 했다. 정자 주변에는 몇 그루의 노송(老松)이 운치 있게 둘러싸여 있으며, 전면에는 전설(傳說)이 담긴 신비로운 연못이 있어 한층 아취(雅趣)를 더해 준다.

한편 전설에 의하면 조선 영조(朝鮮 英祖)때 이곳에는 무안박씨 부자(務安朴氏 富者)가 살았는데, 가노(家奴)의 잘못으로 화(禍)를 입게 되자 종들을 남김없이 죽이려 했다. 그중 한 사람이 산중으로 도피(逃避), 도사(道師)가 되어

죽은 종의한(恨)을 풀고자 이곳 연못에 사는 청룡(靑龍)·황룡(黃龍)을 없애고자 소금 1백석을 뿌린 결과 청룡은 현재 보산정(寶山亭)으로, 황룡은 봉황정(鳳凰亭)으로 각기 가버렸다한다.

뒷날 무안박씨 일문(一門)이 재성(再盛)하자 두 용이 다시 이곳 못으로 옮겨 오도록 기원하기 위해 박수봉(朴壽奉)이 건조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유산정(遊山亭)
 
유산정 모습. 무안읍 교촌리에 있음

유산정 유적비, 무안읍 교촌리 소재
麗朝政丞綿城府院君朴公
諱文五遊山亭 遺蹟碑

 라고 쓰여있음 

-소재지:
 전남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
-材料 : 木造
-크기 :
-時代 : 高麗

문오(文晤-중시조로 부터 7世임, 시호는 문정(文靖), 호는 면남(綿南))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 정승을 지냈고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만년에 퇴직하고 본읍(本邑)에서 유산정(遊山亭)이라는 정자(亭子)를 짓고 못을 만들어 생선지(生鮮池)라 하여 거기서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다라고 면성지(綿城誌)에 기록되어있다.

문오의 증손자인 의룡(義龍-楓亭公)도 벼슬을 그만 둔 후에는 무안에서 살았는데 유산정과 생선지에서 한적하게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무안으로 낙향한 익경(益卿-애한정공)은 문오의 7대손(14세)으로 이 정자를 다시 수리하여 보존해 왔으나

그 후 오랜 세월로 퇴락(頹落)하므로 몇 차례 중건하였다. 현재 건물은 1879년(조선 - 고종시대)에 유적비(遺蹟碑)를 세움( 참판 최익현이 비문을 지음)

 遊山亭 八景(유산정 팔경)                                

杏壇時雨  梅閣淸風 (행단의 비 줄기   매각의 맑은 바람)
鮮池泳鴨  松塢返鶴 (선지의 노는 오리   송오의 두루미)
柄山靑松  高節緣竹 ( 병산의 푸른 솔   고절의 대 숲)
景巖落照  寶平霽月 (경암의 지는 해   보평의 개인달)

*현재의 유산정은 정자 부분의 언덕만 있고, 무안 저수지는 택지로
개발되어 유산정 밑에까지 집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익경 제각
애한정의 전경 

-소재지 :
  전남 무안군
  무안읍
-크기 :
-재료 : 목재
-時代 :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조상
 

 

   무안 박씨(務安朴氏)의 시조(始祖) 진승(進昇)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完山大君) 언화(彦華)의 5세손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무안(務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므로 후손들이 그에  살면서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무안(務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가문(家門)을 일으킨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 진승의 아들 섬(暹)이 남행(南行)하는 현종(顯宗)을 호종(扈從)하여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문종조(文宗朝)에는 각상(各床)에  도형(圖形)되었고, 섬의 6세손 문오(文晤)는 정승(政丞)에 올라 가세(家勢)를 중흥시켰다.

 

  한편 현감(縣監) 세렴(世廉)의 아들 의장(毅長)이 일찍이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글을 배우고 문무(文武)를 겸비했으며,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50여 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의 아우 홍장(弘長)은 대구부사(大邱府使)로 황신과 더불어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가  갖은 굴욕을 받으면서도 죽기를 결심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현신(現身)이었다.
 현령(縣令) 인호(仁毫)의 아들 인(璘)은 임진왜란 때  왕(王)을 평양(平壤)에 호종하여 의주(義州) 행재소(行在所)의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으며,  숙종(肅宗)때 시인(詩人)으로 학명(學名)이  높았던 창하(昌夏: 형조좌랑 규의 아들)는 많은 고율시(古律詩)를 남겼다.

 창하의 아들 징(澄)은 숙종 때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며 청렴하기로 유명했고, 그의 아우 호(浩)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하여 예학(禮學)을 정립했으며, 백응(伯凝)은 명종조에서 진원현감(珍原縣監)을 지내다가

낙향(落鄕)하여 부춘동(富春洞)에 정사(正史)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군수(郡守)를 역임했던 도욱(道郁)·경행(敬行)과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걸(廷杰)이 유명했고, 두성(斗星)은 한말(韓末)에  한글 점자(點字)를 창안하여  맹인들의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15,740가구, 64,69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승(進昇)

 950-1050 연대 고려 현종 때(1012년)의 인물. 무안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34세.  고려사에 아래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벼슬이 국학전주로, 무안(務安)을 식읍으로 받았다.

이것은 당시 고려 불교의 사회제도를 기자(箕子 8조(八條)의 교(敎)로 교민(敎民)의 법도(法度)를 정(定)하고 5교(五敎 즉 五倫儒敎的 敎化)를 베푸니 민속이 순화되었다". 이것으로 특별한 은전(恩典)을 받은 것이 본관(本貫)을 무안(務安)으로 받은 기원이 된다.

국학전주(國學典酒) : 고려시대 중앙의 최고교육기관인 국자감인 교관인 "제주"(祭酒)를 일컫는 듯함.  정삼품(正三品)에 해당했다고 함.( 관리자 註)

국자감 : 607년 중국 수(隋)나라에서 창시되어 고려에서는 992년(성종 11) 태조 이후 교육기관이던 경학(京學)을 국자감으로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국학(國學), 1298년에는 성균감(成均監), 1308년(충선왕 즉위)에는 성균관(成均館), 12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국자감, 1262년에는 또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국자감은 성종이 중앙과 지방관제를 정비하여 관리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관리양성기관의 기능도 가지게 되었는데,여기에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 등 유학(儒學) 전공의 3학과,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 실무직 기술을 습득하는 3학을 두어 이들을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 하였다.

이 중 앞의 3학은 모두 유교의 경전(經典)과 문학을 전공하는 기관으로, 학과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신분에 따른 구별이었으며, 지배계급의 자제로서 장래 고급관원으로 출세하려는 자들이 입학하였다.

한편 율학 등 3학은 일종의 직업학으로 전문직으로 나갈 계급이 낮은 신분의 자제들이 들어갔다. 국자감의 정원은 국자 ·태학 ·사문학이 각각 300명으로 모두 900명이었고, 율학 등 3학은 미상(未詳)이며, 각 학과마다 박사 ·조교가 교수하였다.

 

수학내용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이 모두 동일하여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공통 필수과목으로 하고, 《주역(周易)》 《상서(尙書)》 《주례(周禮)》 《예기(禮記)》 《모시(毛詩)》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등은 전공교과로 하였다. 수학연한은 국자감시에 응시하는 데 필요한 6년과 국자감시에 합격한 후 3년이 지나야 최종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할 수 있어 9년이 소요되었으며, 율학 ·서학 ·산학은 6년이 소요되었다.

 

1063년(문종 17) 문종은 사학(私學)이 융성하고 관학(官學:국자감)이 부진하자 교관의 책임이라 책망하고 국자감의 질적 향상을 꾀하여 직제를 제정하였다. 즉 제거(提擧:종2품)·동제거(同提擧:종2품)·관구(管句:정3품)·판사(判事:정3품) 각 2명, 제주(祭酒:종3품)· 사업(司業:종4품)·승(丞:종6품) 각 1명, 국자박사(정7품)·대학박사(종7품)·주부(注簿:종7품)·사문박사(종8품)·학정(學正:정9품)·학록(學錄:정9품) 각 2명, 학유(學諭:종9품) 4명, 직학(直學:종9품)·서학박사(종9품)·산학박사(종9품) 각 2명과 이속(吏屬)으로 서사(書史)·기관(記官) 각 2명을 두었고, 그 후에도 대사성(大司成:정3품)·명경박사(明經博士:정8품)·율학박사(종8품)·명경학유(明經學諭:종9품)·율학조교 등을 두었다.

 

1109년(예종 4)에는 과거 합격자를 십이도(十二徒)에 많이 빼앗기자 과거응시자를 위하여 국자감에 여택재(麗澤齋:周易)·대빙재(待聘齋:尙書)·경덕재(經德齋:毛詩)·구인재(求仁齋:周禮)·복응재(服膺齋:戴禮)·양정재(養正齋:春秋)·강예재(講藝齋:武學)의 7재를 두고 전공별 강의를 하였다.

1101년(숙종 6) 국자감에 서적포(書籍涯)라는 국립도서관을 설치하고, 1562년 성균관으로 개칭된 뒤에는 강예재가 없는 6재를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9재로 바꾸어 성리학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였다.   (출처 : ENCYBER)


 (暹)

  970-1070 연대. 고려 현종 때의 인물.

박혁거세로부터 35세(世)이며 중시조로부터는 2세(世).

관직은 은청광록대부 좌복야를 지냄. 고려사에 "문종 때에 조칙을 내려 거란족 침입으로 아버지인 현종이 산남(山南)으로 피난갈 때에 말 고삐를 잡고 따라갔으며 수도를 수복할 때까지 절개를 지켜 사직을 안정하였으니 능연가(凌烟閣: 공신의 그림을 그려 모시고 제사하는 곳)에다 그림을 모셔 뒤에 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줌이 좋겠다"라고 기록되어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안북(今安州) 도호부사를 지냈으며 1011년에는 사재경(司宰卿), 장작감

(將作監)이 되었으며 뒤에 우복야를 거쳐 좌복야의 관직을 역임했다.

 

좌복야 :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 고려시대에는 백관(百官)을 총관하던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2품 벼슬이었다. 상서좌복야의 줄인 말이다. 문종 때에는 상서령(尙書令) 다음가는 차관직이며, 1275년(충렬왕 1) 상서도성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될 때 폐지하고, 1298년(충렬왕 24)에 다시 첨의부에 두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상서성이 다시 설치됨에 따라

여기에 다시 두었다가 62년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초에 국가의 재정을 맡아보던 3사(三司)의 정2품 벼슬이었다. 1400년(정종 2) 좌사(左使)로 고쳐 1401년(태종 1) 삼사가 사평부(司平府)로 개편된 뒤에도 좌사라 하였는데 1404년에 참판부사(參判府事:參判司平府事)로 고쳤다가 이듬해에 사평부와 함께 폐지되었다.

 

 ★ 사재시: 고려시대 궁중에서 필요한 해산물(海産物)과 하천(河川)의 교통을 맡아본 관청. 관원으로는 문종 때 판사(判事:정3품)·경(卿:종3품) 각 1명, 소경(少卿:종4품) 1명, 승(丞:종6품) 2명, 주부(注簿:종7품) 2명, 이속(吏屬)으로는 서사(書史) 6명, 기관(記官) 2명, 산사(算士) 2명, 그리고 간수군(看守軍)으로 2명의 잡직장교(雜職將校)를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 사진감(司津監), 1308년(충렬왕 34) 도진사(都津司), 1369년(공민왕 18) 사재감(司宰監) 등으로 고쳤으나, 1372년에 다시 사재시로 환원되어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다. 관청의 명칭이 변경됨에 따라 관직의 명칭과 관원의 정원수도 변동이 심하였다.

 

 ★ 장작감 : 고려시대에 토목공사와 궁궐 및 관청의 영선(營繕)을 담당한 관청. 목종 때 설치되어 감(監)·소감(少監)·승(丞)·주부(注簿) 등을 두었다. 문종 때 관제를 정비하여 판사(判事:종3품) 1명, 감 1명, 소감 1명, 승 2명, 주부 2명과 이속으로 감작(監作) 6명, 기관(記官) 3명, 산사(算士) 1명을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즉위하여 선공감(繕工監)으로 개칭하면서 판사를 폐지하고 감을 종3품으로 올렸다.

 

1308년에 충선왕이 선공사(繕工司)로 고치면서 내부감(內府監:전기의 小府監)·궁궐도감(宮闕都監)·창고도감(倉庫都監)·연등도감(燃燈都監)·국신도감(國洸都監) 등을 병합하고, 관직은 영사(領事:종2품) 1명, 영(令) 3명, 부령(副令) 3명, 승 2명, 주부 2명을 두고 모두 겸직으로 삼았다.

 

1331년(충혜왕 1)에 소부시(小府寺)를 분리하였고, 뒤에 선공시(繕工寺)로 고쳤다가 1356년(공민왕 5) 장작감으로, 1362년에 선공시로, 1369년에 장작감, 1372년에 선공시로 개칭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선공시의 업무에 비해 관원이 적었기 때문에 중방(重房)의 상장군 ·대장군 ·장군 ·낭장 ·별장이 판사 이하의 관직을 겸직하게 하였다.             (출처 : ENCYBER)


 박윤위(允位)

 1050-1150 연대, 3세,  복국정현대부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 고려말(高麗末)∼조선초(朝鮮初)의 인물에『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니 『검교정승(檢校政丞)』이니 하여 『검교(檢校)』란 용어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는 실제의 직책은 맡지 않은 임시직(臨時職) 또는 명예직(名譽職)을 일컫는데 말한다. 이것으로 보아 박윤위는 무관직 중 고위층에서 직책을 수행한 것으로 생각됨.(관리자 註)            (출처 : ENCYBER)


 (儒)

1120-1220 연대, 4세, 보국숭록대부 상장군을 역임, 고려 고종 때는 정주 분도장군을 역임

★ 상장군 :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무관직. 신라 때는 대장군(大將軍)의 아래직위였다. 고려에서는 최고 지휘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오위(千午衛)·감문위(監門衛) 등 이군(二軍) 육위(六衛)에 각각 1명씩을 두었으며, 으뜸벼슬로서 정3품이다. 공민왕 때는 상호군(上護軍)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에 예속된 10위(衛)의 으뜸 벼슬로 정3품관이었다.
  (출처 : ENCYBER)


 성기(成器)

1176-1276 연대, 5세, 보국숭록대부 상장군 및 밀직부사를 역임.子에 구, 부, 선이 있음

★ 밀직부사 : 고려시대 밀직사(密直司)의 관직. 1275년(충렬왕 1) 추밀부사(樞密副使)를 고친 이름이다. 처음에는 종2품의 부사 4명을 두었다가 1311년(충선왕 3)에 부사의 품계를 정3품으로 낮추어 고려 말까지 이어졌다.  (출처 : ENCYBER)


1226-1326 연대, 6세, 박성기의 子. 삼재(三宰). 고려 충렬왕 때에 수사공 좌복야를 지냄

★ 좌복야 : 박섬을 참고하기바람


(瑄)

박성기의 二子. 6세. 수랑장(首郞將)

★ 낭장(郎將) : 고려 ·조선시대의 무관직(武官職). 고려시대는 정6품으로서 이군(二軍)·육위(六衛)에 속했으며, 1령(領)에 2~5명씩 배속되었다. 조선 태조(太祖) 때는 6품관으로서 의흥친군(義興親軍)의 십위(十衛)에 속하였다.                   (출처 : ENCYBER)


박부

 1226-1326 연대. 6세.  관은 은청광록대부 밀직부사, 삼별초의 난 때 나주목사를 지냄,
세 아들(문연, 문오, 문정)의 생부. 무안 경기묘 향사

★ 목사 : 고려 중엽 이후와 조선시대 관찰사 밑에서 목(牧)을 맡아 다스린 정3품 외직(外職) 문관. 목은 큰 도(道)와 중요한 곳에 두었는데, 왕실과 관계가 있는 지방은 작더라도 목으로 승격시켰다. 목사는 신라 때의 군주(軍主)와 그 직위가 같으며, 보통 병권(兵權)을 가졌다. 고려 때는 전국 12목에 목사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에 3명, 충청도에 4명, 경상도에 3명, 전라도에 4명, 황해도에 2명, 강원도에 1명, 함경도에 1명, 평안도에 2명 등 모두 20명의 목사를 두었다.    (출처 : ENCYBER)


 박문연(文衍)

1256-1356 연대. 7세. 공부상서(工部尙書),系 백부(큰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양자가 되었다는 뜻)

★ 공부상서 : 고려 ·조선 시대 산림 ·소택(沼澤) ·공장(工匠) ·건축 ·도요공(陶窯工) ·야금(冶金)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본 중앙관청.

고려 초에는 공관(工官)이라 하다가 995년(성종 14) 상서공부(尙書工部)로 개칭하였으며, 1275년(충렬왕 1) 폐지하였다가 1298년 공조(工曹)를 설치하였다. 속관(屬官)도 명칭의 변경에 따라 인원 ·품계 등이 바뀌었으나

문종(文宗:1046∼1083) 때의 것을 보면 판사(判事:宰臣 겸임) 1명, 상서(尙書:정3품) 1명, 지부사(知部事:他官 겸임) 1명, 시랑(侍郞:정4품) 1명, 낭중(郞中:정5품) 2명, 원외랑(員外郞:정6품) 2명이며, 이속(吏屬)으로 주사(主事) 2명, 영사(令史) 4명, 서령사(書令史) 4명, 기관(記官) 8명, 전서서자(篆書書者) 2명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설치되어 소속부서로는 토목공사를 맡은 영조사(營造司), 공예품의 제작 ·도량형을 관리하는 공야사(攻冶司), 산림 ·소택 ·목재 ·궁궐의 정원 ·교통사무 ·필묵(筆墨)·칠기(漆器)를 맡은 산택사(山澤司)가 있었으며,

소속관청으로는 상의원(尙衣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전연사(典涓司)·장원서(掌苑署)·조지서(造紙署)·와서(瓦署) 등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판서(判書:정2품) 1명, 참판(參判:종2품) 1명, 참의(參議:정3품) 1명, 정랑(正郞:정5품) 3명, 좌랑(佐郞:정6품) 3명이 있었다.

1894년(고종 31) 공무아문(工務衙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이듬해 다시 농상아문(農商衙門)과 합하여 농상공부(農商工部)로 개편되었다.                  (출처 : ENCYBER)


 박문오(文晤)

1258-1358 연대. 7세. 호는 면남(綿南). 벼슬은 은청광록대부 상주국 영평동장사. 면성읍지에 " 박문오는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여 정승에 이르렀고 적을 토벌한 공으로 면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무안읍에 정자를 지어 유산정이라하였고, 못을 파서 생선지라하여 그곳에서 소요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정자는 전란으로 무너져 1879년 고종 기묘년에 중건하고 후손 사간 기종(淇鍾)이 정기를 지었고 1898년 고종 무술년에 유적비를 세우니 참판 최익현이 비문을 지었다. 부인은 정경부인 김씨.

 

- 유산정 : 윗 부문 참조

★ 상주국 : 고려시대의 훈작제도(勳爵制度). 문종 때 국가의 공훈자에게 주기 위해 제정한 훈호(勳號)로, 정2품관에게 주는 것을 상주국, 종2품관에게 주는 것을 주국(柱國)이라 하였다. 이때 같이 제정한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5등작(五等爵)은 작위 수여와 함께 식읍(食邑)을 급봉(給封)하는 실리가 따랐다. 그러나 훈(勳)인 상주국 ·주국은 명예적 훈호였으며, 일반 신하에게는 수여하지 않았고 충렬왕 이후 폐지되었다.                       (출처 : ENCYBER)


박문정(文正)

1270-1370 연대. 7세. 1270년에 나주부사, 보국정헌대부 호부상서를 역임

 ★ 호부상서 : 고려 ·조선시대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토 및 식량과 기타 재화 ·경제에 관한 정무(政務)를 맡아보던 중앙관청. 고려 초기에는 민관(民官)이라 칭하고 어사시랑(御事侍郞)·낭중(郞中)·원외랑(員外郞)이 있었으며, 사탁(司度)·금조(金曹)·창조(倉曹) 등이 이에 속해 있었다. 995년(성종 14)에 상서호부(尙書戶部)로 고치고 사탁을 상서탁지(尙書度支), 금조를 상서금부(尙書金部), 창조를 상서창부(尙書倉部)라 하였다가 후에 이들은 폐하였다.

 

호조는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변하였는데, 문종 때에는 호부(戶部), 1275년(충렬왕 1)에는 판도사(版圖司), 1298년에는 민조(民曹), 1308년에는 민부(民部), 1356년(공민왕 5)에 호부, 1362년에 판도사, 1369년에 민부, 1372년에 다시 판도사로 하였다가 1389년(공양왕 1)에 호조(戶曹)라 고쳤다. 관원의 명칭과 인원수도 자주 변경되었으며, 마지막 호조 때에는 문종시대의 예를 따라 판서 ·상서 ·지부사(知部事)·시랑 ·낭중 ·원외랑 등을 두고 그 밑에 이속(吏屬)으로 영사(令史)·서령사(書令史)·계사(計史)·기관(記官)·산사(算士)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에 설치하여 소속기관으로 3사(司)를 두었다. 3사의 직능은, ① 판적사(版籍司):호구 ·전지(田地)·조세 ·부역 ·공납(貢納)·농사 ·잠업(蠶業)의 권장, 풍흉(豊凶)의 조사 및 진대(賑貸)·염산(斂散) 등에 관한 일, ② 회계사(會計司):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 축적된 금전과 식량의 수지계산 ·해유(解由)·휴흠(虧欠) 등에 관한 일, ③ 경비사(經費司):서울 안의 제반 경비의 지출과 왜인의 양료(粮料)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고 산원(算員) 30명을 두었다.

 

정조 때부터는 경비사를 별례방(別例房)이라 하고, 또 전례방(前例房)이 있어서 종묘와 사직 등의 제물, 진상하는 물건, 사행방물(使行方物) 및 예장(禮葬)의 용품 등에 관한 일을 맡았으며, 필요할 때마다 특별하게 사들이는 사무를 맡은 판별방(版別房), 훈국(訓局)의 군사에 대한 급료지급을 맡은 별영색(別營色), 공물(貢物)의 지급을 맡았던 별고색(別庫色), 절사(節使)의 세폐색(歲幣色),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물건의 지급을 맡았던 응판색(應辦色), 금과 은에 관한 사무를 맡았던 은색(銀色) 등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판서(정2품) 1명, 참판(종2품) 1명, 참의(參議:정3품) 1명, 정랑(正郞:정5품) 3명, 좌랑(佐郞:정6품) 3명, 산학교수(算學敎授:종6품) 1명, 겸교수(兼敎授:종6품) 1명, 별제(別提:종6품) 1명, 산사(종7품) 1명, 계사(計士:종8품) 1명, 산학훈도(算學訓導:정9품) 1명, 회사(會士:종9품) 1명 등이 있었다.               (출처 : ENCYBER)


  박윤유(允

1290-1390 연대. 8세. 총랑(摠郞)(고려 때 정2품 벼슬을 侍郞으로 고친벼슬)

★ 총랑 :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관직. 고려 전기의 상서 6부를 개편한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版圖司) 등 4사(司)를 1308년(충렬왕 34) 선부(選部)·언부(妗部)·민부(民部) 등 3부(部)로 고치면서 총랑(摠郞)을 의랑으로 개칭하였음. 의랑은 정원은 선부 ·민부에 각 3명, 언부에 2명을 두었다. 뒤에 군부사를 이은 총부(摠部)를 따로 설치하고 의랑을 두었다.

 1327년(충숙왕 14) 4사로 복구하면서 총랑으로 고쳤다. 1356년(공민왕 5) 고려 전기 관제를 복구하면서 시랑(侍郞)으로, 1362년 총랑으로 고쳤다.

 

69년 다시 의랑으로, 1372년 다시 1362년의 관제로 복구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조 ·병조 ·호조 ·형조 ·예조 ·공조 등 6조의 총랑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2년(태조 1) 관제를 제정하면서 이조 ·병조 ·호조 ·형조 ·예조 ·공조 등 6조에 의랑을 두었으며, 1405년(태종 5) 의정부(議政府)를 약화시키고 6조를 강화하기 위하여 직제를 개편하면서 폐지하였다.
 (출처 : ENCYBER)      
                                            


 박정(禎)

1325-1425 연대. 9세. 호는 송림거사, 고려 공양왕 때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있으면서 왕에게 직간을 여러차례하다가 좌천으로 자인현의 감무가되었다가 1390년을 전후하여  국사가 어지럽자 관직을 버리고 파평北面의 산속에서 은거함.스스로 호를 송림(松林)이라 하였는데 이는 松京(개성)을 사모하는데서 연유함. 낙향하여 시회장詩會場)을 건립한 것이 보산정의 건립 기원이라함.  조선조 이태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두문불출했다함.

 

보산정 : 윗 부문 참조

★ 간의대부 : 고려시대 문하부(門下府)의 관직. 사의대부(司議大夫)라고도 한다. 원래는 고려 목종 때부터 좌우간의대부가 있었다. 문종 때 정4품관을 좌우 각 1명씩 보직하였다가 1116년(예종 11) 좌우사의대부로 하였으며,

1298년(충렬왕 24) 좌우간의대부로 명칭을 고치고 품계를 내려 종4품관으로 하였는데, 다시 좌우사의대부로 개칭하였다. 1356년(공민왕 5) 통합하여 간의대부로 개칭하고 종3품으로 승격하였다. 1362년 다시 좌우사의대부로,

1369년에 좌우간의대부로, 1372년에 좌우사의대부로 개정하였다. 직능은 보궐(補闕)·습유(拾遺) 등과 함께 낭사(郎舍)로서 봉박(封駁)과 간쟁(諫爭)을 담당하였다.
낭사 :  봉박(封駁:왕에게 上書하여 잘못을 논박하는 일)과 간쟁(諫諍:왕에게 간하는 일).


봉박 : 왕명 및 조칙의 합당하지 않은 것을 봉함하여 되돌려 반박 의견을 신달한 제도.
간쟁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간관(諫官)들이 국왕의 과오나 비행을 비판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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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에는 중서문하성(문하부)의 하부를 구성하는 낭사(郎舍)들이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는 일을 간쟁이라 하였고, 간쟁을 담당하는 사람을 대관(臺官)과 간관(諫官), 즉 대간(臺諫)이라 하였다. 국왕 비판의 명분은 잘못을 반성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귀족의 의견을 대변하여 왕권을 규제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대간은 매우 신중하게 선발되었으며, 재직시에 함부로 체포되거나 곧장 지방관으로 전보되지 않았고 왕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 감무 : 고려시대에 지방의 군 ·현(郡縣)에 파견한 관직

성종 때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정비되기 시작한 고려 전기 지방제도는 현종 때 일단락되었으나, 실제로는 수령을 파견하지 못한 속군현(屬郡縣)이 많이 존재하였다. 이에 1106년(예종 1) 중앙에서 정식으로 관리를 설치하지 못했던 속군현과 향(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 등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처음에는 유주(儒州)·안악(安岳)·장연(長淵) 등에 설치하여 효과를 거두자 우봉(牛峯)·토산(兎山) 등 24현에 확대 설치하였고, 1108년에는 토산(土山) 등 41현, 1172년(명종 2)에는 53현에 설치하는 등 고려시대에 총 2백여 개의 감무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서해도 ·양광도 ·경기 등에 설치되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경상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설치 목적은 주현(主縣)에 의해 피해를 입은 속군현의 유망민을 안정시켜 조세와 역을 효과적으로 수취하면서 중앙집권책을 실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감무는 과거급제자를 파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문종 때 7품 이상인 현령보다 한 품계 낮게 하였다. 그 뒤 1353년(공민왕 2) 경관(京官) 7품 이하로 삼았다가 1359년 현령과 함께 안집별감(安集別監)으로 고쳤으며, 창왕 때 다시 현령감무로 바꾸면서 5~6품으로 하였다. 1413년(태종 13)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현감으로 개칭하였다. 

(출처 : ENCYBER)                                      


 박천무(天茂)

1310-1430 연대. 9세. 판종부사사(判宗簿寺事)


 의룡(義龍)

1330-1430 연대. 10세. 호는 풍정(楓亭).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고 지략을 겸함. 이 성계와는 왕이 되기전부터친교가 있었음. 1388년(고려 우왕)에 內省으로부터 의주목사가 됨. 조선 개국 원훈에등록되고 호조,병조,형조판서, 영중추부사지냄. 1398년(태조 7년)에 「開國定社 輸忠立功」이라는 8자의 御題를 하사받음. 만년에 증조부 면성군(綿城君)이 살았던 무안에서 살았다. 유산정과 생선지에  『親魚知其樂 看竹愛其節』이란 글귀가 있으며 소요함. 선비들의 발의로 1778년에 병산에 사당을 세움.

國朝實錄에 "개국공신에 등록된 사람이 39명이다. 박의룡 등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주어 대대로 록이 끊기지 않게하며 병이나면 ?을 보내어 구호하며 죽으면 예절로써 후히 장사지내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 조선시대에 중추부에 두었던 정1품 관직. 정원은 1명이다.

 

중추부의 영사 즉 영중추 또는 영부사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종래의 중추원을 중추부로 개편하면서 처음 두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고려시대의 중추원은 국가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적 관부였으나, 조선시대의 중추부는 서반의 최고 관부로 있었을 뿐 현직없는 당상관이었다. 따라서 영중추부사·판중추부사·지중추부사등의 관직도 명목상의 지위였다. 보통 의정부나 6조의 고위직에서 물러난 문·무관들을 예우하여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한 일종의 명예직으로 활용되었다. 영중추부사는 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원이 1명이었다.

 또한 의정역임자가 많을 경우에는 서열에 따라 1명만 영중추부사에 임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행판중추부사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중추부에서 직무가 없었으나, 조선중기 이후에는 비변사도제조를 겸직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국가의 중요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94년 이후에 신설된 중추원의 의장은 영중추부사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세종실록, 대전회통.


 박강(綱)

  1350-1450 연대. 11세. 형조참판을 지냄

★ 형조참판 : 조선시대 법률 ·소송 ·형옥(刑獄) 등의 일을 관장한 형조의 정2품 장관이 형조판서이다.  형조 참판은 종이품이고 오늘날 차관에 해당함.


 박이

 1402년(태종 2년)~1478년(성종 9년). 13세.평강공(平康公) 벼슬은 영덕 평강 현감(縣監),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 大夫 兵曹 參判 : 종이품)에 추증됨.  子로 관경(觀卿), 임경(臨卿--함양파, 개부파, 노성파), 익경(益卿--무안파), 항경(恒卿--군수공파), 진경(晋卿--경파).

현감 : 지방행정관서인 현(縣)에 둔 우두머리. 수령(守令)으로 총칭된 지방관의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현의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현령(縣令)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큰 현에는 영(令), 작은 현에는 7품의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는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다가 현감으로 고쳐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으로 정하였다.

 

조선시대의 현감은 현령(종5품)이 관할하는 현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인 역(驛)의 찰방(察訪:종6품)과 동격인,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는데, 조선시대의 현감은 138명에 이르렀다.                                                                           


 본명 : 박두현(朴斗鉉),  별칭 : 자 두성(斗星) (1888~1963)

한글 점자(點字) 창안자.
본관 : 무안(務安)
호 : 송암(松庵)
출생지 : 인천 강화군(江華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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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강화군(江華郡) 출생. 1906년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를 졸업하고, 어의동(於義洞)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3년 제생원 맹아부(濟生院盲啞部:서울맹아학교 전신) 교사에 취임, 맹인교육에 나섰다.

1920년 한글 점자연구에 착수하여 1926년 완성했고, 1935년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 한글 점자투표(點字投票)를 인정받았으며, 8 ·15광복 후 제헌국회에서도 승인을 얻었다. 1931년 성경의 점자원판 제작에 착수하고 1941년 《신약성서》를 완성, 1935년 제생원 교사를 정년퇴직하고, 1936년 인천 영화학교(永化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1939년 사임했다. 6 ·25전쟁으로 신약의 점자 아연판이 소실되자 다시 제작에 착수, 1957년 성경 전서의 점역(點譯)을 완성했다. 또한, 기독교 신자로서 서울 정동교회와 인천 내리교회(內里敎會)에 교적을 두고 맹인들에게 전도했다. 점역 도서만도 76종에 달하며, 생전의 공적으로 맹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제목 : 송암 박두성 선생, 2002년 4월 문화인물로 선정되다.

문화관광부가 1990년부터 시행해 오고 있는 이달의 문화인물에 송암 박두성 선생이 선정되었다. 문화관광부는 2001년도에 추천된 31명의 문화인물과 그 이전 추천자 343명을 대상으로 분야별 자문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2002년도 4월 문화인물 12명을 선정하였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 이달의 문화인물로 정약종, 김환기, 이상재, 박두성, 박수근, 조지훈, 성삼문, 박효관, 김병연, 신숙주, 김승호, 손진태 등을 선정하였다. 송암 박두성 선생은 한글점자를 창안하고, 이료, 역리 등 각종 시각장애인용 교육자료 보급을 통해 시각장애인의 교육에 이바지 한 공로로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이성대 송암기념사업회장은 송암 박두성 선생이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무척 기쁘다며 이를 계기로 점자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해 헌신한 송암 박두성 선생의 애맹정신을 다시금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두성(朴斗星)

1888(고종25) ∼ 1963. 본관은 무안이고, 이명으로 두현 두성이라 하였고 호는 송암이다. 그는 강화군 교동면 상룡리에서 태어났다.

교동봉산의숙을 졸업하고 뜻한바 있어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어느 상회의 사환으로 고용되어 갖은 학대와 멸시로 고생하다가 1년만에 귀국하여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어의동보통학교(효불음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1913년 재생원맹아부(서울맹학교전신)교사로 취임하여 이때부너 맹인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일어점자로만 교육을 해야하는 것에 불만을 품어 오다가 1926년부터 한글점자 연구에 착수하였다.

1923년 1월 비밀리에 조선어 점자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7년간의 연구를 거쳐 1926년에 으른바 훈맹정음이라 불리는 한글점자를 완성하였다.

당시 일제의 검인정교과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한글점자로 조선어독본을 출판하였으며 1935년 일제의 통치시기에 있어서 부면협의원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한글 점자 투표가 가능하게 되어 맹인들의 사회 참여의 길이 뚫리게 되었다.

민족 해방후 제헌국회에서도 그 승인을 얻었다. 1931년부터 성경의 점자원판을 제작에 착수하여 1941년에 점자로 된 신약성서를 완성하였다. 1935년 재생원을 정년퇴직하고 1936년 인천영화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가 1939년에 사임하였다.

1950년 6.25사변으로 모든 정성을 기울여 제작한 신약의점자 아연판이 소실되어 버렸으나 다시 제작에 착수하여 1957년 (성경전서)의 점역을 완성하였다. 또한 맹인의 자활과 사회적 역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의학. 복술학. 안마지압에 이르기까지 76종류의 맹인용 교육자료를 만들어 보급시킴으로서 10여만명에 이르는 맹인들의 아버지 맹인들의 구세주로 추앙받고 있다.

서울 정동교회와 인천 내리교회에 교적을 두고 절망과 좌절에 빠지기 쉬운 맹인들에게 신앙 생활을 전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헌신적으로 사명감에 가득한 활동과 업적으로 인해 은퇴후에도 전국의 많은 맹인들이 찾아와 경의를 표할 만큼 맹인들의 은인으로 절대적인 숭앙을 받는다. 서울 맹아학교 교정에는 공로와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박두성 한글점자찬양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02년 4월의 문화인물 : 박두성(松庵 朴斗星)


 박두성(松庵 朴斗星 : 1888∼1963) : 시각장애인 교육자, 한글점자 창안, 조선어점자여구위원회를 통하여 한글점자 보급, 시각장애인을 위한 주간 회람지 「촉불」발행, 주요서적 점역보급(성경, 명심보감, 의학서적 등)

한글점자 창안자이며 시각장애교육에 생애를 바친 박두성은 구한말인 고종25년에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번지에서 박기만씨의 6남 3녀중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8세가 되던 1895년 7월 무관 출신 성제(誠齊) 이동휘(李東輝)가 강화도에 세운 보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보통학교의 신학문을 수학하고, 성제의 주선으로 한성사범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에서 수학하였다.

졸업 후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전신) 교사로 발탁되어 8년간 근무하였다. 그 후 1913년 제생원(濟生院) 맹아부(盲啞部) 설립과 함께 교사로 발령됨으로써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고 시각장애인들에게 한글점자를 창안하여 주어서(1926년)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이 마음대로 쓰고 읽게하여 암흑 속에서 허덕이는 시각장애인들에게 광원을 찾아주는데 평생을 바치신 분이며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세종대왕으로 일컬음을 받는 분이시다.

박두성의 시각장애인 교육관은 애맹정신의 실천, 끊임없는 권학정신, 생활자립을 위한 교육강화, 잠재능력개발이었으며 이에 평생동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쳤다. 박두성의 위대함은 한글점자 창안은 물론 한글점자의 보급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계의 문맹퇴치에 기여한 것이다. 성경을 비롯 76종의 맹인용 교육자료 도서를 점역·출간하였으며, 점자도서 보급 사업, 통신교육사업 실시, 주간 회람지 「촉불」 발행 등을 통하여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한글점자를 생활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고, 조선어 점자연구회, 육화사 등의 연구조직을 결성, 한글점자를 더욱 연구함으로써 그 실용성을 높였다.

박두성의 신념은 시각장애 교육이 단지 장애인교육이나 자선사업이 되어서는 안되며 직업교육과 더불어 시각장애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 양성과 민족정신을 싹티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박두성의 신념은 일제치하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모든 학교의 조선어 교육이 폐지된 상황에서도 제생원에서는 우리 말과 글의 공교육이 계속되도록 하였다. "… 실명이라는 1차적인 신체적 장애에 시각장애인이 마음대로 읽고 쓸 한글점자가 없으면 시각장애인의 심안을 밝히지 못하며 이로 인해 제 2차, 3차로 장애가 중복·심화되어 정서불안, 열등감, 비사회적 행동의 부차적 장애를 가져오게 되므로 점차 이질적인 방향에로 고착화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장애를 예방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시각장애인에게 문자를 주어 그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박두성의 이런 애절한 진정은 총독부를 설득하였다.

당시 구전식 교육과 점복업을 주로 하는 시각장애인의 생활기반에 박두성이 시각장애 교육에 투신함으로써 한글점자의 창안과 보급, 교수학습방법의 기반 연구 등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 교육은 그 당대에 거의 현대적 모습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박두성의 가르침은 직간접으로 시각장애자 지도자, 교육계·종교계·의약계·예술계의 박사들을 비롯 수많은 인재들을 우리나라 사회에 배출하였다. 박두성은 우리나라 모든 시각장애인의 정신적 지주임과 동시에 애맹사상가로 그 불멸의 업적은 오늘날은 물론 후세에까지 길이 빛날 것이다. (자료원: 인터넷)

 

박두성 선생님

    - 이상진(李相秦) 국립서울맹학교 영어교사 -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천배 만배의 수확을 거두듯
     그 한 분의 눈이 멀어지면서 수많은 맹인들이 눈을 떴다
.>>>

가장 멀리 내다보며 일생을 산 사람을 한 사람 들라면 나는 서슴치 않고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선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선천성 맹인인 나는 그 분에게서 영어를 배워 지금 현재 국립 서울맹학교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나는 그 분을 통하여 정안자(正眼者)들 보다 더 열심히 맹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젊은 시절, 한 때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이제 2백60여명 맹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그들 맹학생들과 함께 삶에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맹학생들에게 틈만 나면 박두성 선생 이야기를 한다. 그는 훈맹정음(訓盲正音)을 창안한 한국 맹인의 아벚ㄹ, 일지기 한글 점자를 창안하여 우리글조차 읽지 못하고 있던 우리 맹인들의 미래의 삶을 깨우쳐준 분이다.

 

나는 17세때인 1942년에 서울맹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인천에서 일본 전자도서관 발행의 영어 강의록을 통하여 겨우 알파벳의 구성원리 정도를 혼자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인천에 계시던 박두성 선생을 직접 찾아 뵙게 되었다. <선생 없이 영어 배우는 책>이라는 영어책을 발견하고 그 책을 빌려와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혼자 공부할 수가 없어서 다시 선생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이 책을 좀 읽어만 주십시오. 제가 점자로 받아 적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려므나"

그래서 나는 매일같이 박선생 댁을 찾아가 영어 공부를 하였다. 선생께서 정확한 발음을 하여 주시는 대로 나는 점차로 받아 적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영어를 극복, 1947년 11월부터 1948년 8월까지 맹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 군정재판 영어 통여관으로 일하기까지 하였다.


그 때 박두성 선생께서는 "나는 비록 영어를 잘 몰랐지만, 점자라는 매체를 통하여 영어를 가르쳤다"고 기뻐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기를 잊지 않으셨다. 언제나 맹학교 졸업생들의 기록카드를 만들어 누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일일이 기억하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맹인들의 성공담을 들려 주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으신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의 말과 글이 말살되던 그 식민지 시대에 자기 가족들에게까지 도외시 당하던 맹인들을 위하여 몸소 점차 타자기를 치시고, 노년에 시력이 희미해지시도록 신구약 성경의 점역까지 끝내신 박두성 선생은 정말 맹인의 앞날을 길 게 다본 분으로서 한국 맹인의 세종대왕이라고 일컬어도 내 스스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겠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천배 만배의 수확을 거두듯 그 한 분의 눈이 멀어지면서 수많은 맹인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능한 목수는 상한 재목을 버리지 않는다"
"맹인은 눈에만 장애가 있을 뿐, 어느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평소에 그가 지녔던 지론이요, 신년이었다.

"점자책은 쌓지 말고 꽂아 두게!"

이 말은 박두성 선생께서 임종하실 때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이 말은 지금 세계 맹인들의 영원한 교훈이요, 지침이다. 나는 맹학생들에게 그의 이 말을 전할 때마다 맹인으로서의 자기 생을 멀리 내다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자료원: 월간지 특집, '길 게 보며 산다', 24-25쪽, 책명,날짜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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