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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균씨가 신정아에게 쓴 마지막 letter

난초9 2016. 1. 5. 15:03

신정아에게 쓴 마지막 letter

  

사랑하는 정아, 울지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씩씩하게 조사 받도록 해요. 세상에 들어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아요.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 각오만 되어있다면 검찰조사가 두렵지 않을 거요. 어제 신문에 ‘당찬 걸음걸이로 씩씩하게 검찰청 계단을 올라 갔다’고 나와 있었는데 평소의 정아 답게 그렇게 조사받아요. 나도 이제 억울하다는 생각 다 버렸어요. 담담한 마음으로 조사받고 있어요.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한 사나이의 젊은 여자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종말을 맞았구나 하는 생각으로 명성과 명예에 대한 집착 다 버렸어요. 누가 무어라 해도 정아에 대한 내 사랑은 진실이었소. “딸같은 나이의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개입할 공간이 없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그리고 그 것은 우리만의 생각입니다.

 

외국에서는 흔한 일이오.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달리면서 내 인생의 종착역을 떠올린 적이 있어요.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은 무언가? 내 인생은 어떤 것 ? 선하게 살았는가 악하게 살았는가? 남을 도우며 살았는가 도움을 받기만하고 살았는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국가 경영을 책임져야 하는 중책을 맡은 공직자로서 과연 내가 이루어낸 것은 최선이었는가 ? 부끄럽게도 그 어디에서도 만점을 받을만한 자신은 없었어요. 한줌도 못되는 명성과 명예 그리고 권력 그런 것을 두고 주위에선 부러워 합니다만 나는 종점을 향해 내닫고 있는 내 인생에 휑하게 비어버린 채워지지 않은 더 큰 空洞에 시린 가슴을 아파해야만 했어요. 마치 공무차 방문 했을때 보았던 시베리아 벌판의 두꺼운 얼음 덩이 위에 매서운 북풍을 안고 나 홀로 서있는 것 처럼… 쓸쓸하고 허무하고 외로운 심정이 되기도 했지요.

 

찢어진 상처를 아파하면서 진흙탕에서 둥굴면서 내 생명을 다 바쳐 사랑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 그 것 또한 내 인생에 채워지지 않은 빈 여백으로 남아 있었어요. 5년전 쯤의 일인가요? 내가 재정 경제부 근무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지인인 쌍용의 김석원 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지요. 자기 아내가 미술관 하나를 운영하고 있는데 사업이 활발하지 못해 문닫게 생겼다고 하더군요. 아내의 전공이 그쪽이고 가난한 화가들을 돕겠다고 시작한 일인데 가진자들이 별로 미술에 관심이 없어 어렵다고 했어요. 내가 그 쪽에 관심이 많은 고위 공직자 이니 변 차관 같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방문이라도 해준다면 미술계가 훨씬 활발해질 거라고 하더군요. 마침 한국의 유망한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으니 내가 한번 다녀가 준다면 문화 관광부 같은데서도 더 관심을 가져줄 ! 거라고 하더군요. 나는 방문 일정을 잡아서 김 회장에게 연락해 주겠노라고 하고 전화를 마쳤지요.

  

성곡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김 회장의 아내인 박 문순씨 였어요. 우리가 박 관장의 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김 회장은 서둘러 나타났는데 외국에서 거래선이 갑자기 찾아와서 늦어졌다고 하면서 미안해 하더군요. 사랑하는 정아, 그 자리 였지요? 내가 정아를 처음 본 것이… 한 묘령의 아가씨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나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 관장이 우리 미술관에 큐레이터라고 소개 하면서 예일대를 나온 재원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변 차관이 예일대에서 석사까지 하셨으니 동창 아니냐고, 한국에 예일대 동창회는 없냐고 하더군요. 우리는 같이 전시된 그림들을 둘러보았고 재능있는 화가들이 참 많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몇가지 그림앞에서 작품평을 했더니 박 관장은 내가 미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칭찬하더군요. 나! 는 화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오.

 

그러나 고교시절 미대에 가려는 생각도 했었고 미술대회에 나가 수상도 여러번 했었지요. 삭막한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미술에 대한 나의 관심은 더 깊어졌고 틈틈이 책도 읽고 화집을 수집하기도 했지요. 30여년 공무원 생활에서 미술은 나의 마음의 고향 같은 것 이었어요. 미술은 시대의 흐름이 있어서 시대를 잘 읽어야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현대에 산다면 그만한 명성을 얻었을? 반대로 피카소가 다빈치의 시대에 살았다 해도 그대답은 동일한 것일 거요. 고흐, 고갱이 루벤스의 시대에 살았다해도 그의 그림들은 하나의 카리카추어적인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을 거요. 현대미술이라고 해서 한가지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시대의 조류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내가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정아,

 

우리는 다시 식당으로 이동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고 그 자리에 정아도 동석 했었지요. 맞은 편에 앉은 정아의 얼굴을 찬찬히 보면서 나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임을 다시 떠올리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었지요. ‘전생에 본 모습이라는 데자뷰인가?’ 그리고 나는 내가 대학시절 고시 공부 한다고 양산 통도사에 들렸던 일을 기억해 내었지요. 밤샘 공부를 하고 잠깐 쉬러 나와 봉발탑 주위를 서성이고 있을 때 한 여인을 보았지요. 어머니와 같이 불공을 ! 드리러 와서 탑주위를 돌고 있는 처녀였어요. 그 고운 자태와 분위기에 ! 취해서 나는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지요. 방에 다시 돌아와도 그 처녀의 모습이 어른 거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더군요. 저녁밥 공양이 시작되어 나는 뜻밖에도 그녀를 다시볼 수 있었어요. 반듯한 이목구비하며 지성적인 분위기등이 나를 다시 사로 ! 잡았지요. 그녀가 밖에 잠깐 나가는 틈을 타서 나는 뒤따라 가 말을 붙여보았고 연락처를 알아내었어요. 미쓰 정 이었는데 집이 나와 같은 부산 이었죠.

 

그후 우리는 산에서 몇번 더 만났고 나는 방학이 끝나 서울에 올라와야 했어요. 그러자 행시가 코앞에 닥쳐 공부에 더 박차를 가해야 했구요. 일년가까이 연락을 할 수 없었고 행시에 합격한 나는 다시 그녀의 부산 주소에 연락을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더군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였어요. 사랑하는 정아, 정아의 얼굴이 그 미쓰 정을 닮았다는 것을 기억해 내곤 어떤 장난 같은 운명의 실가닥 하나를 잡은 것 처럼 생각되었지요. 그리고 며칠후 정아의 전화를 받았지요. 차관실로 한번 방문해도 되겠냐는 전화였지요.

 

 

‘아, 미쓰 정을 닮은 여자…’ 일종의 연민같은게 남아있어 나는 얼른 그렇게 하라고 했지요. 정아는 나같은 나이 많은 남자에게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분위기를 가졌어요. 예일대 동창이라는 동류항 때문에 무언가 도움되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줘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인수분해를 하려면 동류항을 묶어내야할 터인데 만나야 인수분해를 할 수 있을 것 아니겠어요. 나를 만난 정아는 미술관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미국 얘기를 했지요. 미국의 부자들이 얼마나 많이 문화할동에 지원 하는가 얼마나 많은 예술인들을 돕고 있는가 하면서 선진국을 눈 앞에 둔 우리도 부자들이 예술인들을 돕는 나라가 되어야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인정 받을 수 있을 것 이라는 말에 나는 동의 했지요. 미켈란제로 이전에 메디치가가 있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정아,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미치는 한에서 도와주겠다고 약속 했지요. 다시 본 정아는 아주 매력적인 처녀였어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적인 분위기와 재치있는 말 솜씨를 가졌었소 . 50대 후반을 달려가는 나같은 , 사람에게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사랑의 ? 努抵챨篤 불을 붙이기에 충분한 자질을 가졌었소.! 나는 35년을 공무원으로 살아온 사람 이오. 돈은 없어요.

 

그러나 돈가진자를 움직일 수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가장 믿을만 하고 흉허물 없는 고등학교 동창들을 떠올렸지요. 정아가 아는대로 나는 부산 고등학교 출신 이요. 우리 시대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이지요. 나는 중 고등학교를 통해서 늘 우등생이었고 반장을 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들에게 리더쉽을 발휘할 수가 있지요. 내덕에 정부지원을 받고 있는 대우 건설의 박세흠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을 같이 하자고 했고 이 자리에서 성곡 미술관 얘기를 꺼냈지! 요. 미국 부자들의 예술 지원 사업을 역설하면서 우리도 선진국이 되려면 기업들이 문화 사업을 도와야 한다고 했지요 . 물론 며칠전 정아의 말이 생각나서 한 말이었어요.

 

사랑하는 정아,

 

그리고 며칠뒤 나는 정아로부터 대우 건설의 박사장한테 1억을 지원 받았다고 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정아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을 때 나는 흔쾌? 승락했지요. 지금 고백하건데 사실 난 매력 있는 젊은 처녀와의 데이트 약속에 가슴 설레이기도 했어요. 삭막하기만한 황무지 같은 공무원 생활에서도 늙은 나의 심장은 숫컷으로서의 사랑의 감정이 식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했지요. 사랑은 환상의 변주곡인지 모른다는 최근 읽은 어느 서평에 공감합니다. 신이 점지해준 절대절명의 운명같은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라도 어느누구라도 젊었건 늙었건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행동으로 표현할 수도 있어? 사회적인 지위라던가 체면이라던가 가족이라던가 이런 여타의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정아(2)

사랑하는 정아(2)

사랑은 유희라고 한다면 너무 천박해지지만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와 소설의 처절하고 일회적인 사랑의 고정관념만 깬다면 ! 사랑 또한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군요. 인생의 정리 단계에 다시 찾아와준 사랑, 생각해 보면 나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같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6.3 빌딩 스카이 라운지에서 우리는 만났고 나는 오랫만에 진실한 내 인생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어요. 정아에게 한 남자로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매력적인 젊은 여자가 차관님을 봐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멋있는 남자예요” 라고 한 아부성 발언에도 나는 황홀해지는 기분이었소. 사랑은 맹목이라고 했던가요? 평범한 늙은 남자가 그렇게 보였다면 그리고 그 말이 진실 이라면 정아도 이제 사랑의 공범이 된 것 이지요. 그 날 우리는 호텔에 같이 갔고 남의 눈에 뜨이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멀리 인천에 있는 호텔로 갔지요. 신혼 첫날밤 처럼 나는 심장이 콩닥거렸고 정아를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으나 나보다 더 대담했던 정아는 나를 위로해 주었지요. ‘여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예쁜 사슴 한 마리가 길을 잃고 내품에 안겨 있다. 그의 길을 다시 찾을 수 ! 있도록 도와 주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국가 경영을 맡고 있는 고위 공직자로서 한 여자도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만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위도 해보았어요. 사랑하는 정아, 그 날 이후로 나는 ? 포로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흠칫 놀라기도 했지요.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중에도 정아가 떠오르면 미소가 번지고 밤의 환상이 되살아나곤 했지요. 이럴 때 결재 받으러 온 국장들은 덕을 보았을 겁니다. 평소와 달리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으니… 미국에서 본 적이 있는 엔돌핀 정제를 복용한 것 처럼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처럼 내 생활에 활기가 생겼고 부하 직원들에게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지요. 사랑에 달뜬 감정이 내 핏속에서 돌아가고 나는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자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 이지요. 나는 정신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혐오 하오. 정신지상주의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는 기만을 혐오 하오. 나를 어렸을적부터 예술가적인 취향이 있다고 말들 했는데 아마도 이런 기질탓일 거요. 성직자나 승려들을 포함해서 정신 세계만이 참 인생이라고 역설하고 다니는 사람들의 때로 기만적인 행태를 ? 뮌? 보아 온 터요. 공무원 사회의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을 빼! 어버린 경직된 분위기를 혐오하면서 나는 공직생활을 해왔소. 이 것이 때로 나의 인간미가 있는 생각의 폭이 넓은 사람으로 비쳐졌다는 것은 행운 이었소.

 

 

사랑하는 정아, 우리의 밀회는 횟수가 늘어갔고 살을 에이고 뼈를 깍는 것 같은 아픈 사랑의 절대 감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에 알지 못하던 것 이었소. 지금 내가 망가졌고 세상에서 무어라 할 지라도 나의 사랑은 순수했고 나에게 젊음을 되살릴 수 있었던 소중한 체험 이었소. 사랑은 상대를 믿어주고 관용하고 아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서 그가 잘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슴이 울렁거리도록 해주는 것이 사랑 이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이런 나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나를 기만하지 않는 것일 거요. 나는 다시 산업은행 총재이던 부산 고등학교 동기 동창 김창록에게 성곡 미술관을 돕도록 했고 기획 예산처에 걸 그림도 두점을 사도록 조치했소. 다시 나는 기획예산처 장관에 승진했는데 정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길조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사실이오.

 

사랑하는 정아,

 

나는 다시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정아를 사랑한 것은 정말 길조라는 생각이 굳어졌오. 그런말을 내가 직접 했던 것도 기억할 거요. 사랑하는 정아, 나의 행운의 ! 파랑새여! 내가 방콕에 있는 경제사회 이사회 아태본부) 출장을 가게 되어 같이 가겠냐고 반신반의 하면서 물었을 때 정아는 선뜻 따라 나섰어요. 따로 출발해서 방콕에서 만났지요

. ESCAP 총회가 끝나고 하루 더 연장해서 태국 남쪽의 코사무이섬에 정아와 같이 갔었지요. 내가 코사무이섬을 택한 것은 언젠가 동아일보에서 ‘지구의 마지막 남은 파라다이스’라고 소개한 적이 있어 언제라도 한번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소. 섬은 깨끗하고 아름다웠어요. 사람이 밟은 흔적이 없는 것 같은 원시의 모래 해변 코발트 블루의 바닷물 바위에 부딛치는 파도 소리, 일상의 진애에서 해방되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운 해변 이었소. 나는 居塵出塵(속세에 살면서 속세를 초월한)의 군자는 못되는 사람이오. 필부에 불과하오. 정아와 단둘이서 손잡고 코사무이 해변을 거닐면서 그냥 하나의 수컷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소. 석양 무렵의 해변에서 정아의 무릎을 ! 베고 누워 나는 잠깐 잠이 들었소.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정아와! 손을 잡고 울창한 숲속을 한없이 걷는 꿈이었소. 얼마를 걷다가 우리는 오래된 궁전을 발견했소. 우리가 궁전앞에 이르자 장중한 대문이 열리고 수문장이 우리를 맞이합디다. “어서 오십시요. 저희 왕 폐하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면서 그 성의 성주에게 안내 되었어요. 그리고 대신들이 도열해 있는 성대한 만찬이 준비되어있는 방으로 안내 되었지요. 만찬이 끝나고 무도회가 시작되었어요. 그러나 그 때 천둥번개가 일면서 폭풍우가 몰아치더니 커텐이 휘날리고 유리창이 깨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는 잠에서 깨어났지요. 눈을 떠보니 정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왜 그러냐고 무슨일 이냐고 물었더니, “오빠를 좀더 일찍 만났어야 했는데…

 

 

 

우리의 관계가 언젠가 곧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기쁨의 눈물이예요.” 라고 했었지요. 나도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우리의 부적절한 관계가 언젠가는 끝날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죄인이 되어서 끝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소. 서울에 돌아온 후 나는 우리의 관계가 끝난후까지도 정아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지요. 예일대 출신이니 국내대학에서 전임자리라도 하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요. 내가 경제기획원 시절부터 공무원 불교 신도회 회장을 해왔기 때문에 동국대 이사장인 영배스님을 알고 있었지요. 공무원 불교 신도 모임에 의도적으로 영배스님을 설법을 듣기위해 모셔왔어요. 모임이 끝나고 예일대에서 미술 전공한 후배가! 있는데 전임자리 하나 마련해 볼 수 있겠냐고 물었었지요. 영배스님은 검토해 보겠노라고 하면서 그 날은 헤어졌어요. 며칠후 영배스님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구요. 먼저 정아가 학위가 있어야 채용할 수 있다는 것과 자기가 울산 울주군에 흥덕사라고 지은 절이 있는데 개보수를 위해서 10억 정도가 필요하고 울주군에 지원 신청을 했더니 ? 않았다고 하면서 정부에서 지원이 가능한지 알아봐 달라고 했지요. 나는 정아에게 학위가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고 얘기해 주었었고 정아는 박사학위가 있다고 했지요.

 

며칠뒤 나는 영배스님에게! 두가지 뉴스를 알려주었어요. 정아가 박사 학위가 있다는 것과 흥덕사에 10억 지원이 가능하다는 얘기였지요 . 며칠뒤 동국대 이사회에 정아의 채용여부가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일부 반대하는 이사가 있었으나 영배스님의 강경한 태도로 채용쪽으로 가닥이 잡혔지요. 나중 동국대 재단 이사인 장윤 스님이 정아의 채용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면서 학위에 대한 시비가 벌어졌는데 장윤스님이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나는 모르겠소. 장윤스님이 자기가 주지로 있는 전등사의 개보수를 위해 김포군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일이 있었고 거부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흥덕사도 자격이 미달인데 어떻게 지원이 가능했던 것일까 하는점에 의문을 가졌던 것 같소. 아마도 사석에서 영배스님으로부터 정아의 전임 채용을 추천한 인사가 청와대 정책 실장 변 양균이라고 귀띰한 것이 발단이 되어 여기저기 발을 놓아 정보를 추적했던 것 같아요. 영배스님은 후사가 두려워 장윤 스님을 이사 해고라는 극약처방을 했음에도 그때는 이미 언론에 흘러나간 뒤 였소 .

 

사랑하는 정아, 이미 엎질러진 물을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할짓 이지요. 우리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사실 다 털어버리고 범법행위가 있다면 처벌까지도 담담하게 받아들입시다. 나는 직권남용이 주범법 행위가 될 것이고 정아는 사문서 위조와 업무집행 방해가 될 것이요. 나는 법을 집행해 나가야 될 위치에 있던자가 법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사회적 비난과 가정이 있는자가 젊은 여자와 사랑 행각을 벌였다는 도덕적 비난이 쏟아질 거요. 그러나 나의 정아에 대한 사랑이 변치않았고 정아가 나에 대한 사랑이 변치 않았다면 그 것으로 이 시련을 견디어 나갈 수 있소 . 감옥 살이를 한다해도 정아를 생각하며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낼 것이오. 사랑하는 정아, 이제 나는 다시 시린 가슴으로 벌판에 서서 사랑하는 것도 장미향을 맡는 것도 거세된 囚人의 삶을 살아야 할 거요. 열사의 사막에서 타들어 가는 목마름을 적셔줄 물 한모금을 그리며 걷다가 걷다가 그렇게 쓸어질지도 모르오. 그러나 정아에 대한 내 사랑은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정결한 것 이었고 늙은 내 가슴에 따뜻한 피가 흐르게 했고 다시 한번 사랑의 열병을 앓고 진흙탕에서 굴러볼 수 있다는 반짝이는 귀중한 경험을 주었소. 그런 정아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안고 인고의 세월을 견딜 것이오.

 

내 사랑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