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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와 명성황후 초상화 ;``````

난초9 2010. 11. 19. 12:52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과 순종.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입었던 붉은색 곤룡포 차림으로 1890년무렵의 모습이다. 아직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이라, 고종이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황룡포가 아닌 홍룡포 차림이다




고종황제와 신하들의 모습.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 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대한제국 황족들. 앞줄 가운데 모자를 벗은 사람이 고종 황제이고, 그 오른쪽이 순종, 고종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그 옆은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






고종이 대한제국 초기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국한문친서.
고종은 1909년 초 국외망명을 시도할 정도로 일제의 한국침략에 강경하게 맞선 군주였다.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1919년 촬영.



1919년 집무를 보기 위해 겨울옷을 입고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는 고종황제의 모습




러시아 공사관 내 고종 황제 거실. 황제용 더블 베드-황태자용 싱글 베드-응접 세트가 전부였고, 옆 방에서 상궁 둘이 번갈아 기거하며 수발을 들었다.




고종이 파천해 집정할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고종황제의 후궁 양씨(1882년생, 덕혜옹주의 생모).




엄황귀비.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황제를 모셨고, 이어 왕자 은(영친왕)을 낳았다. 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설립, 한국 근대교육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권오창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진영.




1903년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보도된
고종황제와 미국인 에밀리 브라운양 결혼 기사.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
라는 제목으로 브라운양의 클로즈업된 모습과,
고종과 브라운 양이 일산(日傘)으로 가린 연(輦.임금의 수레)을
타고 궁을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한문 앞을 지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국상행렬.




고종황제 국장때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고종황제 국상 전날의 대한문 앞 모습.




1921년 고종황제 제사때의 모습. 중앙이 순종황제이다.
-= IMAGE 1 =-



1894년 시해13개월 前 그려져 ..

지난 1894년(일 메이지(明治) 27년) 9월 10일자로 발행된 명성황후 생전 초상화 보급판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본지가 한 중국인으로부터 입수한 이 초상화는 그림 우편 상단에 세로로 된 한자로 朝鮮國貴顯肖像(조선국귀현초상·사진 ①)이라는 제목 아래 3명의 황실 가족이 그려져 있다. 그림 가운데는 고종(朝鮮國王-조선국왕으로 기록)을 중심으로 왼편에 명성황후 (王妃閔氏로 기록), 오른편엔 고종의 부친인 흥선 대원군의 반신상(半身像)이 담겨져 있다.

초상화 크기는 가로 55cm, 세로 40.4cm. 그림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아 인물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림 밑으로 초상화 발행, 인쇄시기, 주소, 작가, 출판사 명 등이 밝혀져 있다.

띠 장식으로 꾸며진 초상화 밖 아래 작은 글자로 씌여진 설명 내용에 따르면 오른쪽 밑에는 板權所有(판권소유) 明治二七年(메이지 27년-1894년) 九月十日印刷同年同月十日發行(9월10일 인쇄동년동월10일 발행)으로 표기돼 있다.(사진 ②)

래 중간부분은 印刷畵作兼 發行者(인쇄화작겸 발행자)와 東京 京橋區 北楨 拾貳番地 太刀川吉次郞(동경 경교구 북정 12번지 태도천길차랑/타치카와 요시(또는 기치)지로)으로 인쇄됐다.(사진 ③)

명성황후 그림 쪽 아래왼쪽 글자는 印刷所 東京 麴町區 有樂町 三町目 信陽堂(인쇄소 동경 국정구 유락정 삼정목 신양당·사진 ④)으로 적혀 있다.

명성황후 전문학자로 명성황후 사진권위자인 서울대 이태진(64) 국사학 교수는 "이번 초상화는 연대가 가장 앞서고 일본에서 나온 자료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며 “일본이 비슷한 시기에 명성황후를 궁녀라고 왜곡보도하고 있었던 사실도 있으므로 자료소개차원에서도 공개 보도하는 게 좋겠다”고 피력했다.

이 교수는 또 “작가 이름까지 초상화에 밝혀진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당시 1894년에는 일본 삽화가들이 조선궁궐을 내왕하던 시기로 일본 출판사가 세 인물을 한 장에 담아 보급판을 낸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토론토에서 10여 년간 화랑을 경영하는 미술 감정사인 한 고화전문가는 “이 조선왕실 초상화는 사진이 아닌 오리지널 리토그라프(Origin. Lithograph/석판인쇄)의 희귀한 작품으로 연대와 작가, 발행처 등 세세한 부분까지 밝혀져 있는 높은 기술수준으로 찍어낸 가치를 지닌 초상화”라고 분석했다.

반면 조선시대 의식연구 전문가인 한영우 박사는 “그림은 복장과 가발 등으로 볼 때 진짜 명성황후가 아니다”라며 “연대가 1894년 인 것은 출판사 사정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지가 입수한 이 초상화는 명성황후가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고종 31년)으로 만 44세에 시해당하기 13개월 전인 1894년 9월 10일에 그린 작품으로, 그간 궁녀 등 가짜라고 논란됐던 사진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