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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朴씨 대종친회

난초9 2012. 8. 28. 09:15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 朴씨 대종친회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되며

본지 60호 ‘한국 성씨·본관 총괄 기획특집 기사에 이어

성주이씨(61호), 합천이씨(62호), 서림·서천이씨(63호), 광산탁씨(64호),

진주류씨(65호), 의성김씨(66호), 나주임씨(69호), 괴산피씨(72호)를 게재했고

이번 호는 박씨 대종친회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재음미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지면을 활용하여

각 성·본 대종회 및 종친회의 단합과 교육, 홍보효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로 번창

 

(사)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박씨의 유래

옛 문헌(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 등)을 근거로

소설가 박종화가 재구성한 박씨 시조왕 탄생 설화를 보자.

신라오릉보존회 기관지인 ‘朴氏新羅’(박씨신라)지 1집에 실린

박종화의 ‘시조왕의 탄강하신 사실’이다.


“육촌의 장들이 알천에 모여 하늘에 제례를 올리고 있을 때 일이었다.

멀리 양산 아래 나정을 바라보니 수풀 사이에 오색이 영롱한 서기가 뻗치고

선인이 서기를 향하여 꿇어서 절하는 모습이뵈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친히 가서 보니 한 포가 있는데, 난(卵)의 형상 같기도 하고

포(匏)의 형상 같기도 했다.

소벌공은 신이하게 생각하여 포를 풀어헤쳐본 즉 기이한 일이었다.

이곳에 시조께서 탄생이 되는 것이었다….

진한 사람들의 말에 포를 박이라 말하는 고로 포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박(朴)으로 성을 삼고, 혁연(赫然)히 당세(當世)에 살아 있다는 뜻으로

혁거세로 휘자를 삼았다.”


역사가들의 추정에 의하면 박혁거세 탄생시기는 기원전 69년이다.

박씨는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076년 동안 맥을 이어오고 있다.

 

  대제 때 참례하는 헌관들이 숭덕전 앞에 모였다. 가운데 붉은 제복을 입은 이가 초헌관인

박기상 이사장. 춘향, 추향대제의 규모와 절차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사진제공=신라오릉보존회)

 

경명왕·경애왕으로 왕손 이어져


시조왕 박혁거세 거서간으로부터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6대 지마왕, 7대 일성왕,

8대 아달라왕 등 신라 초기에는 왕손으로 계보를 이어온다.

 

그리고 신라 후기 53대 왕인 신덕왕 때까지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다

경명왕, 경애왕으로 이어지며 왕손계보의 후손이 번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덕왕 이전 박씨 왕손의 방계 혈통 계보는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박씨 성이 여러 본관으로 관적되며 후손들이 번연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후기의 명군 경명왕의 아들 대부터가 된다.

 

경명왕 이전의 왕, 5대 파사왕의 후손 계보임을 주장하는 몇몇 박씨들이

있지만 이들도 본관조와 파사왕 사이의 중시조에 대해서는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시조의 29세손인 경명왕은

밀성대군 언침, 고양대군 언성, 속함대군 언신, 죽성대군 언립,

사벌대군 언창, 완산대군 언화, 강남대군 언지, 월성대군 언의 등

 8대군(혹은 국상공 교순을 포함하여 9대군이라고도 한다)을 두었다.

 

우리나라의 박씨는 시조의 30세손인 밀성대군의

밀양박씨를 비롯한 이들로부터 관적돼 뻗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을 중조(中祖) 혹은 본관조(本貫祖)로 삼은 박씨가 전체 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다만 왕손의 방계 후손들의 경우 박씨 성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 말기에 성씨 문화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박씨 혈통임에도 박씨 성을 쓰지 않거나 잃어버린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혁거세의 30세 후손인 밀성대군(밀양박씨)을 중심으로하는

이른바 박씨 중조 ‘8박(혹은 9박)’에 이르기까지

박씨 세계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게 왕손 중심으로 뻗어내린다.


경명왕 이전의 인물을 본관조로 삼은 박씨는 없거나 있어도 무의미하다.

그런데 뒤에 살펴보겠지만, 경명왕 이전의 인물을 본관조로 삼은 몇몇 박씨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신라오릉 보존회·박씨대종친회(이하 박씨대종친회)도 인정한다.

 

신라오릉추향대제에 운집한 인파. 매년 춘분과 추분 날 대제에 전국 박씨들이

참석해 경주가 축제의 장이 되곤 한다. (사진제공=신라오릉보존회)


박씨대종친회는 박씨씨족사 연구가인 박문봉이 제작한

 ‘박씨신라선원세계도’를 기준으로 삼는데,

박씨대종친회 사무총장은 “이 계통도의 내용이

 박씨대종친회의 입장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서 ‘선원(璿源)이라는 뜻은 왕실의 본관을 높여 일컫는 말이다.


‘신라박씨선원세계도’에는 경명왕까지 이어지는 왕손계보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세계도에 나타난 30세 밀성대군을 위시한 8대군(혹은 9대군)부터 관적사항을 보면

다음 표와 같이 고려조에서부터 조선조까지 흐르는 기간 동안

다시 여러 본관으로 분적되거나 혹은 스스로 칭관하기도 한다.


신라박씨선원세계도에 나타난 바로는 이 외에도 30세손을 본관조로 한 경우가

계림박씨, 경주박씨가 올라 있고,

30세손 이전 세손을 본관조로 한 경우는 9세손을 중조로 삼은 비안박씨,

17세손을 중조로 한 여주박씨, 21세손을 중조로한 강릉박씨, 25세손을 중조로 한 면천박씨 등이

 있다.


그러나 최근 한국성씨총연합회에서 펴낸 ‘한국성씨총감’에

 이들 박씨 대부분 신라 5대 파사왕 계통이며, 고려조 중후기에 관적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밀양, 고령, 함양, 죽산, 상산, 전주, 순천, 월성, 울산 등의 본관을 사용한 것은

고려 초 경명왕의 아홉 아들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의 박씨들은 이 9박으로부터 분관·칭관했거나

그 한참 후대에 세수 미상의 시조인물을 중조로 하여 관적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신라왕손 만파일원’이라는 박씨대종친회의 캐치프레이즈 그대로

박씨는 모두 가까운 한 문중이다.

 

 

 


 

제18대 박기상 이사장호 6월 15일

 출범

‘숭고한 뜻 이어받아 혼신의 노력’ 약속

 

  제18대 이사장 취임식 날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운데)가

함께하고 있다. (사진제공=신라오릉보존회)


경주에 있는 신라 개국 초기의 다섯 왕릉을 신라오릉이라 한다.

시조왕 박혁거세와

시조왕비 알영,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등의 왕릉이다.

오릉 경내에는 시조왕을 받들어 제향을 모시는 숭덕전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숭덕전은 세종대왕이 재위 11년이 되던 해에 전각을 짓고

제향을 올리라는 명에 따라 지어졌고,

경종

재위 3년에 ‘숭덕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959년에 ‘신라오릉보존회’가 설립되면서

국가에서 하던 향사를 박씨문중이 주관하고 있다.

 

‘신라오릉보존회’는 1968년 박씨종친회와 통합하면서

(사)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조직 최고책임자는 ‘회장’이라 칭했으나

1994년 이후 이사장으로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박근혜 경선후보 축사 “고향에 온 느낌이다”


한편, 지난 6월 15일 센트럴시티 컨벤션터에서 있은

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이사장 취임식에서 박기상 이사장이 취임했다.

 

이날 박기상 이사장은 취임 인사말을 통해

 “어르신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전임 이사장님을 비롯한

왕가의 후손들께서 이루어놓은 빛나는 결실과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혼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고 했다.

 

박기상 이사장 취임에 따라

지난 6월 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총본부 사무소도

우신건설(회장 박기상)사옥으로 이전했다.


이날 박씨 문중의 일원으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경선 후보가 참석하여 “박기상 신임 이사장님의 취임식에 참석하니

마음이 푸근하고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을 받는다”며 “인생 삼락이라 했는데

저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가족도 없지만 여기 종친 여러분들이

가족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주고있어서 마음 든든하다”고 축사를 하기도 했다.

 

 


 

■ 인터뷰 

 

(사)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박기상 이사장 

    
“명실상부한 박씨 문중의 버팀목 되게 할 터”


박기상 박씨대종친회 이사장은

밀양박씨 밀성부군파 후손으로 경북 성주군에서 1939년에

출생하여 대구 능인고를 졸업하고, 영남대 공대 기계과를 졸업했다.

1980년 우신건설주식회사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현재까지 굴지의 건설회사를 이끌고 있으며, 국민생활체육협의회부회장,

고려대최고경영자 총교우회 11대 회장,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강남구상공회의소 회장 등 다방면에 걸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또 서울시장 우수시공표창,대통령표창 등 사회에 공헌한 데 대한 공로로 큰 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 5월 23일 박씨대종친회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6월 15일 취임,

임기를 시작하고 있는 박기상 이사장을 역삼동 우신건설 사옥 회장실에서 만났다.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박씨성을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일까.

굴지의 건설회사 창업주 회장으로서의 무게 때문일까.

 박기상 우신건설 회장, 박씨대종친회 이사장과 차분히 앉아

인터뷰를 하는 것이 송구할 지경이다.


그래서 지난 6월 15일 취임한 취임식날을 돌아보며 숨을 돌린다.

 이날 박기상 이사장은 취임식에서 뜻 깊은 취임사를 했다.

 

이사장으로서 장차 사단법인 신라오릉보존회와 박씨대종친회를

운영할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취임식장에 박씨대종친회로서는 반가운 손님이 참석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취임식을 지켜본 것.

박기상 이사장도 크게 고무 됐다고 한다.

 

 

▶이사장으로 취임한지 얼마 안 됐는데 소감과 인사를 한다면….

“먼저 우리 박씨 성손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한다.

사단법인 신라오릉보존회, 박씨대종친회(이하 본회라 칭함)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잘 이끌어 오신 박재원 이사장님께서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하심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부족한데 이사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전임 이사장님을 비롯한 왕가의 후손들께서 이루어놓은 빛나는 결실과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혼신의노력을 다해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박씨대종친회가 갖는 위상과 역할이 있다면.


“명실상부한 박씨 문중의 버팀목으로 거듭나도록 할 것이다.

그러려면 적극적인 참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래서 박씨대종친회에 참여하신 부이사장, 이사, 시도본부회장과 시군지부장,

전·릉참봉, 중앙청년회, 성모사봉찬부녀회들의 큰 봉사 업적을

모든 박씨 후손들에게 귀감이되게 할 생각이다.

이분들이 봉사하신 공로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서 이미 위직을 이임하신 분들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각종 행사 때 위직 봉직 시의 제복을 그대로 착용하시고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개선할 생각이다.”

 

▶자발적인 참여를 위한 대책이 있는가 

“그렇게 되도록 운영체계를 갖출 것이다.

운영기금 기부자의 소중한 뜻을 후손들과 함께 기릴수 있는 방법을 적극모색하겠다.

보다 구체적으로 기부 금액을 분담할 안도 마련돼 있다.

박씨대종친회를 빛내주시는 분도 고문, 지도위원 자문위원직으로 모셔 귀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역사이니 행사가 크고,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각종 행사는 가급적 숭덕전에 모여 치루고, 가족 동반도 가능하게 할 생각이다.

숭덕전을 국가지정 문화재로 국가가 관리해주니 우리로서는 편하다.

이날 전국의 박씨후손들이 저마다 향토음식을 마련해 와서 나눠먹는다면

얼마나 멋진 축제가 되겠는가.

춘분과 추분 두 차례 열리는 대제가 전국에서 많은 인파가 몰릴 정도의 축제가 됐으면 한다.”

 

▶이번에 박씨대종친회에 일억원을 기부했다. 적지않은 금액인데….

“보답의 뜻이자, 조상께 올리는 예물이라고 해두자.

상호간의 협력을 도모하고 박씨대종친회의 발전에 더 크게 기여할 것을 약속한다.

일억원은 그런 각오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라오릉보존회와 5백만 박씨 성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감사드린다. 이 한몸을 5백만 성손의 밀알로 삼도록 하겠다는 것을 약속드리겠다.”

 

(사)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총본부 사무소 입구.

박기상 이사장 취임과 함께 서울 종로구 낙원빌딩 314호 시대를 끝내고

우신건설 사옥에 쾌적하고 넓은 공간의 총본부 사무소를 마련했다.

 


 

박씨를 빛낸 인물


한국서 3번째 인구 많아… 박혁거세~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신라왕손 후예로 고려·조선·현대까지 명문거족

박씨 성을 가진 왕이나 영웅호걸을 거론하며 그 위대함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가장 오래 전인물로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로부터

10왕, 근세에 와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에이르기까지

박씨 인물사 자체가 한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가 망한 뒤 본관제도를 통해 중앙집권적 권력기반을 강화하며

성씨문화를 꽃피웠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는 동안

각 박씨 본관은 명문거족으로 발전하거나 잊혀져갔다.


성씨와 족보연구가인 이수건씨의 책을 통해서 살펴보면,

역시 밀성대군의 밀양박씨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현세에 이르기까지

명문거족으로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묘지(금석문), 신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등

성씨에 대해 기록한 자료들을 근거로 이수건씨는 ‘한국의 성씨와 족보’에서

여러 박씨들의 역사를 다른 성씨·본관과 함께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선 고려 전기 대표적인 문벌 귀족(3품 이상의 고급관인)이었다가

무신란 기타 정변으로 인해 가계 기록이 조선시대에 유전되지 못한 성관은

정주류씨 장단한씨 양천최씨 등 모두 60여 성관이 있는데,

이 중에는 평산박씨, 면천박씨 춘천박씨 등 3개 박씨가 포함돼 있다.


또 고려전기에 대표적인 문벌귀족으로 후기의 권문세족이 되었다가

조선시대까지 명문으로 그 성세가 지속된 성관은 파평윤씨 등 38성관이 있는데

이중에 죽산박씨, 순천박씨, 무안박씨 등 3박씨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박씨 중에서 죽산박씨는 고려초기에서 15세기까지의 수없이 많은 정변을 이겨내고

명문거족으로 세력을 떨쳐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초기에 5명, 무신집권기 3명, 원의 간섭기및 후기에 5명으로

15세기까지 명문으로서의 영예를 이었다.

 

그에 반해 평산박씨는 고려 전기에 무려 16명을 고급관인으로 배출했으나

그 후에는 몰락하다시 자취가 사라졌다.

 

박씨의 대종을 이루는 밀양박씨는 원나라 간섭기와 여말에 5명을 대거 진출시

키면서 등장하여 15세기에 명문 거족으로 성장했다.


한편 조선 중기(1506~1720)의 문과 급제자 성관의 도별 통계표에 나타난

20명 이상의 급제자를 배출한 성관은 총 73개 성으로 나타났고

이중 박씨는 죽산박씨, 밀양박씨, 함양박씨, 고령박씨,

반남박씨 등 5개 성관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후기 잡과 출신자의 성관을 보면

박씨는 밀양박씨가 166명을 배출하여 전체 성·관 중에서 9위를 차지했다.

잡과라 하지만 1위가 전주이씨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때 이미 잡과가 신분상승의 큰 기회가 됐던 것 같다.

 

밀양박씨가 9위를 차지한 의미가 그만큼 크다. 전통의 명문거족으로서 새로운 신분질서에 적응

하면서 새로운 상류계급의 구성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朴씨 본관

 

밀양박씨가 전체 박씨의 77% 차지
인구 1만 명 이상인 본관도 수두룩


박씨신라선원세계도는 1985년 국세조사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됐는데,

이른바 8박(9박) 본관을 포함하여 17개 본관의 중조를 중심으로 도표화 해놓고 있다.

그 외에 시조의 몇 대 후손인지 불분명한 박씨 성을 쓰는 본관 110여 개도

가구 및 인구 수 순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한국성씨총감’에 수록된바에 따르면 이중 상당수가 밀양박씨 등

이른바 8박(혹은 9박)으로부터 나와 분관했다.


지난 2000년의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는 어땠을까.

성씨 본관별 인구수로 보면 총 121만5918가구, 389만5121명으로 집계됐다.

이중 인구 1만명 이상인 박씨는 밀양박씨 등 15개 박씨가 전체 박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밀양박씨는 303만여명으로 전체 박씨의 77.8%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밀양을 위시한 8박 중심의 인구 1만명 이상인 15개 본관이

362만여명으로 93%에 이른다.


참고로 인구수 1만명 이상인 박씨는 다음과 같다.

 

 

박병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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